#essay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설득하여 원하는 바를 이루어 내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특히 요즘 사회에는 정보의 홍수와 수많은 미디어의 출현으로 역설적이게도 절대적 진리에 대한 탐구는 점점 더 어려워만 가고있으며, 특정 목적을 가진 많은 기업 및 단체들이 더욱 교묘하게 매체와 심리를 활용하여 상대방을 기술적으로 설득시키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대부분의 정당들은 사람들의 심리를 기술적으로 활용하여 정치적 우호감을 확산시키고 있으며, 수많은 기업들의 상업 광고는 우리의 소비 심리를 교란시키고 소비의 마법 앞에 굴복시키고 있다.

이런 사회적 현실 속에서 냉철한 판단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그들이 사용하는 설득의 심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인류가 반드시 추구해야할 진리에의 탐구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로버트 치알디니’ 의 저서 ‘설득의 심리학’ 을 기반으로 설득의 심리와 기술에 대해 알아보고 보다 냉철한 현대인으로 거듭나고 한다.

설득의 무기

문명의 발전은 인간이 무의식적인 사고 없이 자동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작업이 늘면서 이루어 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명의 발전과 복잡한 사회 구조가 현대인을 보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진화시켰다고 생각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복잡한 사회는 수백년간의 사회적 통념이란 비 논리적 허점을 낳았고, 우리는 복잡한 사회를 사회적 통념으로 부터의 추상화를 거쳐 이해하게 되었다. 즉, 너무나 많은 정보를 처리하기 위한 판단근거로 절대적 진리를 통한 냉철한 판단은 점차 어려워 지고 인습적 통념에 의존하여 판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 뿐만 아니라 동물의 세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칠면조는 새끼가 내는 ‘칩칩’ 거리는 소리로만 자식의 유무를 판단하는 데 이는 사실 절대적 진실과 근거에 의거한 것이 아닌 수십 수백년간 새끼는 ‘칩칩’ 거리며 운다라는 사회적 동물적 통념을 근거로 하여 판단을 하는 것이고, 특정 목적을 가진 누군가가 이를 악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현실 사회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비싼 것이 좋은 것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통념, 무언가 이유를 말하면 그 타당성에 관계없이 논리적으로 더 옳아보이는 인습적 통념, 전문가의 말은 진실일 확률이 높다는 전문가에 대한 의존이 바로 그 예이다. 수많은 미디어는 이를 광고에 활용하고 수많은 전문가와 고부가가치 상품들에 대한 프리미엄 전략 등의 모태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좀 더 일반화 하면 사람의 행동에는 자동화된 패턴이 존재한다. 라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데, 특정 전문가 집단과 사회적 관습에 의존하는 것을 넘어서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특정한 자동화된 패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비싼 물건을 구매하고 난 뒤에 보여주는 물건은 상대적으로 아주 저렴하게 느껴지는 대비 효과 의 경우 등도 오랜 시장 거래의 관습에서 얻어진 비논리적 통념의 예로 볼 수 있다.

설득의 원칙

앞의 문단에서 우리는 설득의 기본적인 원리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의 설득의 원칙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첫번째 원칙은 상호성의 원칙 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호의를 받으면 항상 갚으려고 하는 습성이 있는데 이것은 상호성의 원칙 의 근간이 된다.
이러한 상호성의 원칙은 수많은 판촉의 모델로써 활용되고 있다. 특정 온라인 쇼핑몰에서 회원 가입을 하면 포인트를 준다거나, 값비싼 물건을 50% 파격적으로 할인한다는 점을 강조하여 상대적으로 양보를 하는 포지션을 취하는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상인들이 물건을 흥정시 처음에 값비싼 가격을 부르고 차츰 차츰 가격을 내려 원래 팔고자 했던 가격에 매매하는 기법도 이러한 상호성의 원칙을 활용한 설득의 원리라 볼 수 있다.

두번째 원칙은 일관성의 원칙 이다.
이를 쉽게 표현하면 우리는 한번 내린 판단을 유지하려 하는 습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원칙 또한 삶의 너무나 많은 부분에 퍼져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알지 못한다.
가령, 헬스장을 등록하고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헬스장 등록이라는 선택은 내가 내린 선택이므로 헬스장을 거의 가지 않더라도 이것은 아주 바람직한 선택이었다고 합리화 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때문에 헬스장에서는 고객이 오던 오지 않던 최초 결제일 한번만 잘 구스르고 설득하면 남은 기간동안 서비스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기간이 지나면 지날때마다 고객들의 충성도는 올라가게 된다. 또 다른 예로 자동 결제를 하면 파격적으로 상품의 가격을 깍아주는 많은 서비스들이 있는데, 이것은 최초의 한번의 선택이 어렵지 한번 선택을 내린 뒤에는 사람들이 가급적 결정을 유지하려고 하는 습성을 잘 이용한 것이다. 특히 음악 이용권의 경우 최초의 한 두달의 경우 무료에 가까운 가격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사람들의 일관성의 원칙 을 잘 활용한 예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일관성의 원칙 의 또다른 확장은 사람들의 자아이미지를 바꾸어 그들이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게 할 수 있다 는 것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브랜딩 그 자체의 목적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유명한 스포츠 브랜드인 ‘나이키’ 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들은 운동화를 구매하는 소비자가 자기 스스로 경쟁을 즐기고 열정이 넘치며 활력적인 사람이라는 자아 이미지를 내도록 끊임없이 부추기게 되고,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이미지의 연속성에서 지속적인 구매를 하도록 유도한다.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가?

위의 두가지 원칙 말고도 우리 사회에서는 기술적으로 끊임없이 우리의 심리를 이용하고 활용하는 설득의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충실한 소비자로써 기존 정치 세력의 충직한 지지자로써 대중을 설득한다.

수세기가 지나면서 사회 경제적 우위에 서있는 기업과 단체 소수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중을 설득해 왔으며, 미디어의 홍수인 오늘날 이런 현상은 더욱 더 위험하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생각해보자. 인류의 위대한 변혁은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 절대적 진리와 논리적인 이성에 입각하고 과감히 이를 부수는 것에서 시작되었으며, 오늘날 모든 현대인은 더욱 발전된 미래를 위해 절대로 통념에 대한 관성으로 인해 절대적 진리에 대한 추구를 멈추어서는 안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를 비롯한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설득의 기술을 이해하고 정의를 설득하고 통념에 설득당하지 않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참조 문헌
로버트 치알디니, 설득의 심리학

불평을 경계하라

우리는 살면서 너무도 많은 ‘불평’을 한다. 미용실에서 자른 머리가 내 마음에 들지 않을때, 직장에서 상사가 내게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하는 것 같을때, 우연히 들른 식당이 맛이 없을 때, 원하던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처럼 많은 사소하고 큰 일에서 우리는 불평을 늘어 놓는다. 이런 불평의 대상은 대게는 나 스스로 이지만 때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많은 훌륭한 사람들, 좋은 책들에 하나 같이 우리에게 불평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지만, 그 말만 듣고 이것을 실천하기에는 너무 사소하고 무턱대고 그 말들에 따르기에는 구체적인 이유도 사실 알지 못한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우리가 불평을 하는 이유, 또 불평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나의 주관적인 생각을 담아보고자 한다.

우리는 왜 불평을 하는가?

우리가 불평을 하는 이유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책임을 나에게로 돌리기 위함이다.
시험에서 떨어지거나 직장에서 질책을 받거나 하던 사업이 안되는 경우 우리는 불평이라는 간편하고 달콤한 해결책을 찾는다. 시험을 준비한 시간이 짧아서 떨어졌다거나 혹은 직장 동료가 내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거나 시장이 너무 불황이어서 사업이 망했다는 불평처럼 우리는 우리의 실패를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 에 대해 불평함으로써 우리 주변사람들에게 “나를 공격 하지 마시오!” 라는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다. 때문에 많은 경우 우리가 하는 불평들은 제 3자가 볼 때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스스로도 과거의 많은 일들이 어쩔 수 없는 결과로 귀결되었음에 안도 아닌 안도, 위안 아닌 위안을 얻고는 한다.

때로 많은 사람들은 사실 불평을 하는 그 사실에 대한 정확한 이유와 원인을 마음 속 깊은 곳에 이해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다른 불평을 하곤 하는데, 이를 통해 그들은 주변 사람들로 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게 된다.

불평의 마법

짧은 순간이지만 불평은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답답했던 마음도 불평한마디 툭 던지고 잘못된 상황 탓이거니 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잘못된 것은 전부 바깥 세상 탓인것만 같다. 불평의 마법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사실 불평이란 한낱 단어들의 조합이자 생각없이 내뱉는 달콤한 담배 한모금과 같은 것이지만 지속적인 불평은 어느덧 우리 마음을 심각하게 손상시킨다.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 에게 모든 책임을 돌려버린 탓에 우리 스스로 우리가 불평을 한 대상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선언해 버린 것이다. 이 선언은 마음속 깊은 곳에 잠식하고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속에 우리를 가두어 버린다. 가령 사법고시에 떨어진 뒤 ‘사법고시는 정말 말도안되. 천재가 아니면 붙을 수 없다니까?’ 라는 한마디의 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 머릿속의 확고한 진실로 자리잡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평의 마법이다. 한 마디의 불평의 우리의 무한한 가능성을 서서히 잠식해 나간다.

불평의 마법에서 벗어나기

흔히 ‘사람의 그릇’ 이라는 말을 하고는 한다. 필자는 이 단어를 너무도 싫어하고 허세가 가득한 단어임에 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그 ‘사람의 그릇’ 이란 불평의 정도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평의 마법 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속에 가두고 책임감을 털어낼 수 있지만, 그만큼 세상을 향한 가능성을 담는 우리의 그릇을 점점 작아지게 함이 그 까닭이다.

그래서, 필자가 생각하는 불평의 마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조금 답답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때로는 한마디 툭 뱉고 싶은 불평을 참고 침착하게 정말 불평의 원인을 탐색해 나가야 한다.

“왜 나는 지금 불만이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앞으로는 내가 이런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계속 하는 것은 그 순간은 정말 답답한 순간이 아닐 수 없지만, 이렇게 조금 묵직한 어깨를 가지고 불평의 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면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는 세상의 모든 가능성을 담을 넉넉한 그릇을 가지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묵직한 어깨를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하여

늘 그렇듯이 오늘의 포스팅도 필자 자신에 대한 성찰이 많이 반영된 글이다.
하루 하루 열심히 살아나가고, 하루 하루 부족한 부분을 체워가고 있지만 가끔은 이렇게 불평한마디 툭 던지고 책임감을 내려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을 때가 있고, 또 자주 그래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매번 툭 던져온 이 불평이란 것이 스스로를 좀 먹이고 있음을 느끼고 다시한번 마음을 다잡고자 이렇게 글을 써내려 간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필자와 같이 불평의 달콤함에 빠져든 기억이 있다면, 불평의 달콤함 보다는 묵직한 책임감의 어깨를 가지고 세상의 모든 가능성을 한껏 받아들여 성장해 나가길 기원한다.


‘천재’란 누구인가?

천재란 일반적으로 일반적인 인간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력한 능력을 타고난 자로 여겨지고, 다르게 말하면 일반적인 사람과는 ‘경쟁’ 자체가 무의미한 특별한 사람이라고 우리에게 여겨지기도 한다. 수영 천재, 피겨 스케이팅 천재, 컴퓨터 천재 등등 우리는 살면서 ‘천재’ 라는 말을 너무도 자주 듣게되고 가끔은 이 세상엔 왜 이렇게 천재들이 많을까 하는 무력감을 느끼며 ‘경쟁 할 수 없는 일반인’ 이라는 굴레 안에 스스로 들어가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분야에서 천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철저히 주관적으로 ‘천재’에 대해 재해석 해 보고자 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천재’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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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란 자신의 운명을 걸머쥐고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지향점을 가지고 실천하며, 그에 따른 결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사실 이렇게 천재에 대한 단편적으로 정의는 너무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또 어떻게 보면’천재’를 너무 과소평가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가령 예를 들어보자.

상대방에 대한 사랑에 인생을 불사른 로미오와 줄리엣,

필자는 무언가 ‘특별한’ 두뇌 혹은 재능을 가지는 사람들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많은 천재들 즉, 영화 속 주인공, 예술가, 기업가 들은 사실상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똑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
어쩌면 영화 속의 주인공들, 희대의 로맨티스트, 예술가, 기업가 들은 모두 ‘천재’라는 한가지의 범주로 요약 될는지도 모른다.

사회적 책임, 도덕적 관념, 모든 나를 구속한다고 핑계대는 제약들이 없어진 상태 내게 아무런 의무도 지워지지 않고 금전적 제약도 심지어 법의 제약도 없어진 그런 상태로 내일을 맞이한다면 나에게 무엇을 하고 싶은 지를 묻는 다면 나는 무어라고 대답한단 말인가.

“무언가 큰 일을 하고싶다. 수억 명의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 하고, 어떤 완벽한 이상사회로 이 사회와 세계가 진행중이라면 그 사회의 도래에 공헌 할 수 있는 그런 세계 변화의 흐름을 잡고 흔들 수 있는 그런 위대한 일을 하고싶다.”

이 따위 대답에 내가 부응하기 위해서는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해야 하나. 그저 그 일을 찾는 것? 절박함이 없다. 반드시 대의를 이루겠다는 나는 하루하루 매시간 매초 온 힘을 다해 이를 고민해야 한다.

나는 벤저민 프랭클린을 참 좋아한다.

철저한 자기관리와 건국의 아버지로 알려진 프랭클린, 나는 그의 자기 관리를 위한 노력이나 훌륭한 일을 하려 하는 긍지보다 다른 부분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그는 변치않는 신념과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주변의 시선과 자신이 처한 환경, 미래에 대한 불안에 대해 그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끊임없이 내가 필요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위해 정진해 나갔다.

인생을 살아가는 정도라는 것이 무의미해 지고, 한치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오늘의 사회에는 더욱더 가장 본받아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흔히 인생을 살아나가는 것은 눈덮힌 산을 오르는 것에 비유된다.

가장 연륜있고, 실력있는 선구자는 우리를 앞서 오르고 대부분의 우리는 선구자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오르며 끊임없이 내가 올바른 발걸음을 디뎠는지 생각한다.

내 눈앞의 수많은 발자국을 보며 어느 길이 가장 쉽고 효과적인 길인지를 가늠하려 하고, 내가 걸어온 발자국을 보며 산턱 언저리에서 후회와 불안에 이따금 뒤돌아 우두커니 서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산을 잘 오르는 사람들은 오로지 정상만을 바라보고 오를 뿐이다.

우리 앞을 지나간 선구자는 물론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그때의 날씨는 어땠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며, 가장 올바른 선택은 목적지에 시선을 던져두고 나를 믿고 신중하게 한걸음 한걸음을 옮기는 것인 것을 그들은 잘 아는 것이다.

요즘 세상을 무한 경쟁사회라고 한다.

주변을 달려가는 수많은 주자들을 바라보며 조바심을 느끼게 만드는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작 한치 앞에 있는 사람을 꽁무니 만을 쫓게도 되고, 한발작 뒤에 있는 주자들을 보며 가끔은 안도하기도 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또 마음을 다잡고자 이런글을 쓰는지 모른다.

오늘 하루도 앞서나가는 자에대한 조바심을 뒤따라 오는 자에 대한 오만함을 내려놓고 정상만을 바라보며 누구의 발자국도 아닌 나의 발자국을 남길 수 있는 하루, 내면의 단단함이 더해지는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은 조직생활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직장 상사와의 갈등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생활의 가장 큰 어려움으로 상사와의 갈등을 꼽고 있다. 과연 세상의 모든 상사들은 다 나쁜 사람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본 글은 어디까지나 사회생활에 대한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만을 적어보는 것으로 본 글이 직장 내 상사와의 갈등에 대한 일반적인 해안은 결코 되지 못하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을 먼저 밝히고 글을 시작한다.

직장 상사를 대하는 태도 대한 일반적인 관념은 어떠한가 부터 생각해 보자.

흔히 직장상사를 이야기 할때 ‘모신다’ 혹은 ‘사수’, ‘배운다’ 등의 단어가 일반적이다.

사실 이런 단어는 벌써부터 직장 상사와 나의 관계가 상/하 관계 혹은 갑/을 관계, 선임자/후임자의 수직적인 관계라고 화자 스스로가 생각하는 경우 사용된다.

따라서 후임자는 직장 상사의 말에 최대한 맞추려고 하고, 직장 상사가 나를 한 없이 착하고, 성실한 그런 ‘직원’ 이자 ‘후임자’로 보여지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과연 현명한 처신일까?

과연 직장 상사는 ‘후임자’, ‘하급자’ 를 필요로 하고 훌륭한 ‘을’이 필요한 것일까?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아니다’ 이다.

기업은 더 이상 학교이자 가정이 아니며 ‘하급자’, ‘직원’ 보다는 비즈니스 파트너 가 필요한 것이다.

착하고 말잘듣는 직원보다는, 좀 쌀쌀 맞더라도 잘난 와 그래도 잘 합을 맞출 수 있는 파트너 가 되어 주기를 원한다.

선임자가 상대방을 후임자 가 아닌 파트너 로 인정하게 되는 순간 선임자는 선임으로써의 버팀목 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덜어내고 인간 대 인간으로써 함께 협력하여 일을 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남자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수직문화의 끝을 보여주는 군대에서는 이런 장면들을 많이 보아왔을 것이다.

항상 착하기만 하고 저 친구 정말 고생하는구나 하는 후임과 동기들은 어디까지나 보호해야할 대상이며 나의 아랫사람으로 많은 경우 힘든일은 혼자 다하면서도 정작 인정은 받지 못하는 많은 병사들이 있는 반면, 좀 뺀질거리더라도 눈치 빠르고 소신있는 병사들은 전우 로써 인정을 받는 경우는 아주 흔한 일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우리는 조직의 한 가운데에 놓여있게 된다.

필자를 비롯한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당돌하고 일 좀 하는 비즈니스 파트너 로써 상급자의 도움이 필요없는 믿을만한 파트너로 거듭나 훌륭한 사회의 조직원으로 거듭난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오늘은 노벨상, 퓰리처 상 수상자인 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 이 남긴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꿈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어쩔수 없는 운명이지만
그래도 희망이 없는 곳에는 생명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꿈을 계속 찾는 것이다.

우리들은 항상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하루를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꿈을 이루지만, 다른 누군가는 삶이 끝나는 그 날까지 꿈을 이루지 못하기도 합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혹시 지금, 꿈을 이루셨나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겁니다.
만약 가지고 있던 꿈을 몇개 쯤 이루었을 수 있지만 수천 수만개의 새로움 꿈들을 우리는 매일 좇으며 평생을 살아갑니다.
이렇게 우리가 꿈을 말할때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지요.

극작가 유진 오닐은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정말 잘 표현해 줍니다.
바로, 꿈의 실현에 대해 꿈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요.

꿈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이 운명이라니, 어차피 이루지도 못할 꿈을 더 이상 좇을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가진 꿈을 이루기는 너무 힘들어요.”
“꿈은 어렸을 때나 가지는 거죠”
“저는 현실적인 사람이에요.”

그리고 더 이상 꿈을 꾸는 의미가 없다고 말을 합니다.

이룰수 없는 꿈을 꾸는 것은 정말 헛된 일일까요?

그래도 희망이 없는 곳에는 생명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꿈을 계속 찾는 것이다.

유진 오닐의 한마디는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줍니다.
꿈은 이루기 위해 꾸는 것이지만, 꿈을 좇는 것은 그 결과가 아닌 과정에 참된 의미가 있다고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지요.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에 또, 앞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기 위해 꿈을 꿉니다.
설사 꿈을 이루는 것을 결국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낙담하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매일 매일 꿈을 좇는 과정 그 자체 만으로 우리는 살아있음을 느끼고 또 앞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분들도 오늘 하루 자신이 가진 원대한 꿈을 의심하고 걱정하지 말고 있는 그 자체로 추구하며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하루가 되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요즘 시대에 ‘아름다움’이란 너무도 상업적인 목적 또 하나의 유희이자 쾌락으로써 소비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로부터 ‘아름다움’ 이란 많은 철학자들이 하나의 ‘이상’ 으로 추구해 왔던 개념이었고 인간이 추구해야 할 숭고한 가치로 고려되어 왔습니다.
오늘 글에서는 ‘아름다움’이란 의미가 점차 가벼워 지고 퇴색되어 가는 요즘 시대에 진정한 ‘아름다움’ 이란 무엇이며 올바른 아름다움의 추구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고대의 피타고라스 학파는 아름다움이란 비례와 조화, 균형이며, 수적으로 표현이 가능한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완벽한 굴곡을 자랑하는 도자기 혹은 이상적인 신체 비율의 가진 사람의 신체처럼 사물 혹은 사람이 가지는 그 고유의 비례와 조화의 미 그 자체를 ‘아름다움’이라 이야기 했습니다. 요즘 말하는 ‘8등신 황금비율’과 같은 말들도 어느정도는 고대 시대의 아름다움의 척도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옛날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는 훨씬 객관적인 하나의 성질로써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중세에 들어서도 사물 혹은 사람의 성질 로서의 ‘아름다움’의 개념은 연장되어 왔습니다. 참된 아름다움 이란 감각기관이나 상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 파악되는 정신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아름다움’ 이란 철저히 객관적인 성질로써 이해되었습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객관적인 성질’로서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아름다움’ 이란 대상의 성질일 수 있지만, 이것은 대상을 인식하는 우리의 주관이 느끼는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고대의 미가 단순히 균형, 조화를 추구했다면, 근대의 아름다움 에서는 이를 특정짓는 것이 없이 오로지 우리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 이라는 것이지요. 가령 아무리 완벽한 자태를 뽐내는 도자기가 있더라도 우리가 이 도자기를 보고 감동을 느끼고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그 도자기는 더 이상 우리에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수천년이 지나 칠이 벗겨지고 부수어진 도자기가 우리에게 옛 선조들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게 해주고 우리 마음 속에 아름답다는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면 그 도자기는 그 외관에 상관없이 우리에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지요.

철학자 칸트는 이러한 근대의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을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미란 결코 객관적인 것이 아니며, 인식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 속에 미적 즐거움을 일으키는 대상들의 형식은 객관적이나, 그것은 개념적으로 파악될 수 없다. 그것이 객관적 성질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미적 즐거움을 환기시킬 수 있도록 구성된 것을 뿐이다. 하지만 미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일련의 공통점을 가진다.”

이러한 근대의 아름다움의 개념의 현재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 녹아 있습니다. 오랜 기간 훈련을 통해 짓 무르고 갈라진 ‘김연아’ 선수의 발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도 이러한 주관적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가질 수 있는 것일까?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가지기 위해 많은 활동을 합니다. 외적인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 성형수술을 하기도 하고 헬스장을 다니고 운동을 하며 다이어트를 하기도 하면서 ‘아름다움’을 소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이런 많은 활동이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아름다움’을 가지게 해 줄까요?
근대 이후의 많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결론은 ‘아니오’입니다.

왜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없을까요?
위에서 말했듯이 ‘아름다움’이란 객관적인 성질이 아닌 우리 마음 속에 미적 즐거움을 환기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모든 사람들이 많은 다양한 의미로 나에게 아름다운 감정을 느껴야 이루어 지는 것이지요. 그것이 외적인 아름다움이던 혹은 내적인 아름다움일 수 있고, 몇몇 사람들이 나의 외적 혹은 내적 아름다움에 공감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소유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아름다움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추구하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아름다워 질 수 없는 것일까요? 아름다움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무슨 낙이 있을까요?

위의 질문에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지름길은 미를 소유하는 것이 아닌 추구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다.”

아름 다움 자체를 소유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돌아오는 것은 실패 뿐을 것입니다. 모든 형태의 아름다움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궁극적 아름다움을 가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노력은 모두 실패로 귀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름다움이 주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보다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누군가를 가슴속 깊이 사랑하고, 나의 주권 또 내 주변 사람들의 자유와 주권에 대한 관심, 즉 나와 이 세계를 아름답게 하고자 하는 노력과 그런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를 통해 아름다움이 주는 진정한 즐거움을 알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님도 오늘 하루 ‘아름다움’을 가지지 못한 나를 채찍질 하기 보다 하루 하루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멋진 인생을 살아가 아름다움이 주는 진정한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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