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요즘 시대에 ‘아름다움’이란 너무도 상업적인 목적 또 하나의 유희이자 쾌락으로써 소비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로부터 ‘아름다움’ 이란 많은 철학자들이 하나의 ‘이상’ 으로 추구해 왔던 개념이었고 인간이 추구해야 할 숭고한 가치로 고려되어 왔습니다.
오늘 글에서는 ‘아름다움’이란 의미가 점차 가벼워 지고 퇴색되어 가는 요즘 시대에 진정한 ‘아름다움’ 이란 무엇이며 올바른 아름다움의 추구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고대의 피타고라스 학파는 아름다움이란 비례와 조화, 균형이며, 수적으로 표현이 가능한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완벽한 굴곡을 자랑하는 도자기 혹은 이상적인 신체 비율의 가진 사람의 신체처럼 사물 혹은 사람이 가지는 그 고유의 비례와 조화의 미 그 자체를 ‘아름다움’이라 이야기 했습니다. 요즘 말하는 ‘8등신 황금비율’과 같은 말들도 어느정도는 고대 시대의 아름다움의 척도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옛날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는 훨씬 객관적인 하나의 성질로써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중세에 들어서도 사물 혹은 사람의 성질 로서의 ‘아름다움’의 개념은 연장되어 왔습니다. 참된 아름다움 이란 감각기관이나 상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 파악되는 정신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아름다움’ 이란 철저히 객관적인 성질로써 이해되었습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객관적인 성질’로서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아름다움’ 이란 대상의 성질일 수 있지만, 이것은 대상을 인식하는 우리의 주관이 느끼는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고대의 미가 단순히 균형, 조화를 추구했다면, 근대의 아름다움 에서는 이를 특정짓는 것이 없이 오로지 우리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 이라는 것이지요. 가령 아무리 완벽한 자태를 뽐내는 도자기가 있더라도 우리가 이 도자기를 보고 감동을 느끼고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그 도자기는 더 이상 우리에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수천년이 지나 칠이 벗겨지고 부수어진 도자기가 우리에게 옛 선조들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게 해주고 우리 마음 속에 아름답다는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면 그 도자기는 그 외관에 상관없이 우리에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지요.

철학자 칸트는 이러한 근대의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을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미란 결코 객관적인 것이 아니며, 인식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 속에 미적 즐거움을 일으키는 대상들의 형식은 객관적이나, 그것은 개념적으로 파악될 수 없다. 그것이 객관적 성질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미적 즐거움을 환기시킬 수 있도록 구성된 것을 뿐이다. 하지만 미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일련의 공통점을 가진다.”

이러한 근대의 아름다움의 개념의 현재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 녹아 있습니다. 오랜 기간 훈련을 통해 짓 무르고 갈라진 ‘김연아’ 선수의 발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도 이러한 주관적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가질 수 있는 것일까?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가지기 위해 많은 활동을 합니다. 외적인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 성형수술을 하기도 하고 헬스장을 다니고 운동을 하며 다이어트를 하기도 하면서 ‘아름다움’을 소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이런 많은 활동이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아름다움’을 가지게 해 줄까요?
근대 이후의 많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결론은 ‘아니오’입니다.

왜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없을까요?
위에서 말했듯이 ‘아름다움’이란 객관적인 성질이 아닌 우리 마음 속에 미적 즐거움을 환기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모든 사람들이 많은 다양한 의미로 나에게 아름다운 감정을 느껴야 이루어 지는 것이지요. 그것이 외적인 아름다움이던 혹은 내적인 아름다움일 수 있고, 몇몇 사람들이 나의 외적 혹은 내적 아름다움에 공감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소유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아름다움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추구하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아름다워 질 수 없는 것일까요? 아름다움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무슨 낙이 있을까요?

위의 질문에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지름길은 미를 소유하는 것이 아닌 추구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다.”

아름 다움 자체를 소유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돌아오는 것은 실패 뿐을 것입니다. 모든 형태의 아름다움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궁극적 아름다움을 가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노력은 모두 실패로 귀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름다움이 주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보다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누군가를 가슴속 깊이 사랑하고, 나의 주권 또 내 주변 사람들의 자유와 주권에 대한 관심, 즉 나와 이 세계를 아름답게 하고자 하는 노력과 그런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를 통해 아름다움이 주는 진정한 즐거움을 알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님도 오늘 하루 ‘아름다움’을 가지지 못한 나를 채찍질 하기 보다 하루 하루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멋진 인생을 살아가 아름다움이 주는 진정한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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