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개론
고대: 인류 문화의 시작
보통 서로마 제국의 몰락한 476년까지를 그 기간으로 한다.
농업 혁명
기원전 1만년 ~ 8000년
농업과 목축의 발달로 잉여생산물이 생기고 그에따라 사유재산도 생기고 고대 문명이 시작되었다.
고대 문명
기원전 8000년 부터 기원전 4000년 까지
이집트 문명
나일강 유역에서 발생한 문명으로 기원전 3100년경 가장 먼저 통일한 이집트는 유럽이 원시사회, 중국은 문자도 없던 선사시대에 1대 파라오 나르메르의 통치로 찬란한 문명을 이어간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시작되어 여러 왕조를 거쳐 기원전 400년 마케도니아 제국 건설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점령까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어 문명은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인더스 → 인도
황하 → 중국
함무라비 법전, 모든 법률의 시조가 되다
인류문명은 그 자체만으로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강력한 법률로 보호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흥성 / 수메르인이 설형문자를 발명하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상된다. 함무라비는 온 천하의 왕이라 일컬으며 정의의 왕이라 일컷는다.
함무라비 법전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속국들을 법률로 통일하고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지위를 강조하는 한편 각종 사회관계를 조정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였으며, 사회질서 안정에 이바지하였다.
하지만, 신격화된 왕권을 강조하고, 법 앞에서 만민 평등 개념이 빠졌으며 노예를 사유재산으로 인정한 허점이 있다.
공평(equality)의 개념을 확립한 계기가 된다.
법치관리의 막을 열고, 인류문명과 법률생활의 기틀을 닦았으며 훗날 수많은 법률의 토대가 된다.
나르메르, 이집트를 통일하다 (기원전 3100년)
이집트는 유구한 문명을 가진 나라로써 전체 인류 문명사에서 가지는 의의가 매우 크다.
이집트 통일 이전의 역사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수로를 만들어 농지에 물을 공급하고,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강력한 권위와 힘이 필요하였으며, 이 힘이 마침내 왕권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인류 최초의 왕권이 된다.
이집트의 통일로 인해 고대 이집트 문명의 발전을 촉진하고 찬란한 인류문명을 형성하였다.
고대의 로마 통치자들은 이집트의 obelisk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못해 로마 광장에 이전하였다.
바빌론 유수 유대인의 방랑이 시작되다
서아시아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우르 셈족의 한 부락에서 시작해서
외적의 침략으로 부족이 멸망하자 Abraham은 부락민을 데리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한 땅 ‘가나안’에 도착한다.
이곳의 원주민을 페니키아인이라 하고 이주민인 그들 민족은 헤브라이라 불린다.
이곳에서 Abraham의 손자 야곱이 하느님의 사자와 씨름을 해서 이겨 이름을 Israel로 바꾼다.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2세가 헤브라이인을 노예로 삼아 힘든 노동을 시키자 헤브라이인의 우두머리 모세가 홍해를 건너 이집트에서 도망가 여호와에게 십계명을 받고 유대교를 창시한다.
모세가 죽은 뒤 여호수아가 무리를 이끌고 가나안에 정착하나 12개의 쇼페팀으로 분할되고 말고 (이 중 가장 유명한 쇼페팀이 삼손이다) 이를 틈타 필리스틴민족의 공격을 받는데 이때 사울이 나타나 모두를 구한다.
다윗과 솔로몬왕을 거쳐 남부의 유다왕국과 북부의 이스라엘로 분열되는데, 이 중 유다왕국은 신바빌로니아의 속국이었으나 유다의왕 여호야김이 이집트에 투항하여 신바빌로니아의 왕 네브카드네자르의 분노를 사게 된다.
시드기야의 죽음, Babylonian Captivity
이를 통해 유대인들은 20C에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까지 유랑민족으로 남게 되며, 경제적 이익과, 배움을 중시하는 민족으로 거듭나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등 수많은 인재를 남긴다.
늑대가 기른 로물루스, 로마를 건국하다
로마의 풍습과 법률, 정신, 라틴어 등은 모두 유럽 대부분의 지역으로 전파되어 중동, 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이런 광활한 지역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친 제국은 로마가 유일하다.
아가멤논이 이끄는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 목마’ 전술로 소아시아의 트로이를 함락하고 이때,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이아스는 탈출하여 알바롱가를 건립하고 이는 로마인의 시조가 된다. 곧 아물리우스에 의해 왕가가 찬탈되고 로물루스, 레무스가 기원전 753년 로마를 건립한다.
로물루스는 정치권력을 원로원(Senatus), 민회(Comitia)로 분리하여 개국 초부터 로마에 민주적 분위기를 불어넣는다.
사비니여인의 강탈을 통해 로마의 여성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BC 4C말까지 강대국으로 군림하며 포에니 전쟁때 카르타고를 멸망시킨다.
솔론의 개혁, 민주주의의 기초를 다지다
아테네의 발달한 상품경제와 건전한 민주정치 페리클레스는 이를 두고
“아테네는 모든 면에서 그리스의 학교다” 라는 말을 남긴다.
아테네의 모든 정치권력은 귀족의 후예에 의해 장악되었고, 집정관, 원로원 구성원도 귀족 중에서만 선출되었다.
이에 수석집정관을 임명하고 헥테모로이를 폐지하여 노예로 전락했던 아테네인이 모두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 에는 이런 말이 있다.
“합리적인 개혁만이 대중으로부터 인정받는다. 지금까지 발생하였던 모든 혁명은 한 가지 소유제를 보호하는 동시에 다른 소유제에 반대하고자 한 혁명이다. 솔론의 개혁은 채권자의 재산에 손실을 입혀 채무자의 재산을 보호한 혁명이다.”
솔론의 개혁은 공정의 개념을 제시하고 그리스 민주제도와 자유에 기틀을 다졌을 뿐 아니라 유럽 민주제도의 중요한 근간이 된다.
고대 그리스 올림픽, 인류를 단결하다
엘리스(Elis) VS 스파르타(Sparta) 처럼 고대 그리스는 여러 도시국가로 나뉘어 싸움은 끊이지 않았지만, 서로 같은 민족임은 의식하고 있었다.
이에 오랜 분열과 살상에 불만을 느끼고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 평화롭고 통일된 그리스를 건립해주길 바랐고, 제우스, 헤라클레스 등 영웅이 출몰하게 된다.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
“노예제가 그리스 사회의 발전과 번영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노예제가 없었다면 그리스는 존재 할 수 없었고, 그리스의 예술과 과학도 발전할 수 없었을 것”
올림픽을 통해 도시국가들 사이의 긴장된 대치 국면도 어느 정도 완화된다.
석가모니, 세계적인 종교인 불교가 탄생하다
석가모니는 왕위를 포기하고 출가하여
사문유관(四門遊觀) : 네 개의 성문에서 인생의 4고(四苦)를 직접 보고 늙음, 병듦, 죽음에서 자유/해탈을 추구하였다.
석가모니 불교의 네 가지 진리
고 : 인생이 생로병사/희로애락 등 고통으로 가득 참을 인식.
집 : 고통의 원인을 가리키는 것으로써 인간이 갖가지 욕망을 행동으로 옮겨 바라는 결과를 얻으려 하는데, 그러한 행동의 대가로 원망과 고통이 생겨남
멸 :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욕망을 없애야 함.
도 : 수행을 제시
공자와 노자, 동양 문명의 핵심이 되다.
공자의 유가
「논어」 완전한 철학 체계와 일관된 논리가 부족
노자의 도가
도가 천지를 만들고 덕이 도의 성능이며 천지가 만물을 나아 기르고, 만물은 각기 다른 형상을 가지고 있으며, 용도 또한 다 달라 만물에는 귀천이 없고, 자연창조의 기원을 자연 자체에 초자연적인 힘이 지배한다는 종교와 유심론의 기초를 부정
살라미스 해전, 아테네 문명이 우둑 서다
BC 490년
기원전 490년 일어난 세계역사상 최초 유럽과 아시아의 대규모 국제전쟁
고대 그리스는 지리적 개념일 뿐 여러 도시국가로 이루어진 나라였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리스 연합군의 지휘관이자 스파르타의 왕인 레오니다스와 전투를 벌인다. → 영화 ‘330’의 기원
살라미스 해전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지휘아래 그리스의 완승으로 끝이 난다.
이를 통해 아테네는 에게 해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흑해로 통하는 요충지를 통제하며 비잔틴을 포함한 에게 해 연안 전략적 요충지를 획득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 서양 철학의 기원이 되다
르네상스→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로 돌아가자
소크라테스의 사상
BC 469 ~ 399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유심주의 철학자로써 제자들의 질문에 문답식으로 대답해 제자들이 스스로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귀납법 의 아버지라 불렸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산파술이라는 학문의 갈래로도 발전
사물의 진정한 원인을 개별적인 현상의 배후에 있는 일반적인 사물의 공통된 본성으로 간주하여 만물의 통일성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일반성고, 개별성, 본질과 현상의 경지로 올려놓았다.
플라톤의 유심주의
BC 427~ 347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유심론(Spiritualism)철학자로써 펠레폰네소스전쟁 중 탄생하였다.
“물질의 세계 밖에 비물질적인 관념의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가 있는데, 이데아의 세계만이 실재하는 것이고 물질의 세계는 이데아의 세계를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 철학을 집대성한 아리스토텔레스
BC384 ~ 322
“현실생활에서 여러 가지 삼각형 형태의 물건들이 존재한 후에야 사람들의 머릿속에 비로소 삼각형에 대한 관념이 생겨나며 대수와 기하의 법칙은 자연 현상 속에서 추상화 된 것이다. 생명과 세계는 끊임없이 운동을 하고 있고, 운동을 하지 않으면 시간이나 공간, 물질도 없으며, 모든 것이 변증법적 관념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과학의 탄생을 알리고 과학을 하나의 방대한 유기체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매우 위대한 철학자이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 동서양 교류를 촉진하다.
펠레폰네소스 전쟁
BC431 ~ 404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각각 자기 편 동맹 시들을 거느리고 싸운 전쟁으로써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이 나며 이는 고대 그리스가 쇠망하고, 북부 이웃국가 마케도니아가 강성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알렉산드로스 :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로, 그리스 문화를 좋아하여 전세계 그리스화의 꿈을 꾼다.
그리스 반란 평정 후 페르시아로 진격하여 다리우스 3세를 무너뜨리고 그의 어머니와 아내, 딸을 포로로 잡아 페르시아의 반과 바꾼다.
이로써 마케도니아는 이집트를 통치하게 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나일강 삼각주 서쪽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한다.
동서양교류의 촉진
원정 이전의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 민족이 세계유일의 개화된 문명이라 생각했으나 원정 후 모든 민족은 평등하며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13년 만에 그의 대제국은 멸망하고 만다.
진시황,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다.
BC259 ~ 210
전국시기에 전국칠웅이 패권 다툼을 벌인 결과 서쪽의 진나라가 강력한 권세를 가지게 된다.
진시황
황제로부터 직접적인 통제를 받고 중앙에서 군현에 이르는 관료제를 도입하고, 중농억상 정책을 펼치며, 도량형을 통일한다.
하지만 분서갱유를 통해 학술과 사상의 자유로운 발전을 심각하게 억압하였으며, 흉노족을 통합하고 만리장성을 축조하는 업적을 세운다.
카이사르(BC100에 탄생), 로마 제국의 기초를 닦다.
당시 로마 공화국은 심각한 정치적위기에 직면하고 있었으며, 노예제가 가장 발달한 국가였다.
또한 군사약탈, 조공 등 피정복 지역에 대한 압박과 수탈로 로마 사회의 계급 분화가 가속화 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에 기원전 130년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여러 관점에서 다양한 민주개혁 방안을 제안하게 되는데 처음의 민주운동은 합법적 개정요구이나 점차 폭동과 내란이라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변화하게 된다.
결국 기원전 70년, 검투사 출신의 노예반란 지도자 ‘스파르타쿠스’가 주도하는 노예봉기가 나라를 풍전등화의 위기로 몰아간다.
노예봉기는 로마의 노예제도와 노예제 경제를 뿌리째 흔들어 놓았고, 노예주들은 노예를 통제하고 농사를 짓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노예제 경제의 발전을 보장할 수 없는 공화정 체제를 변화시켜야만 했고 이때 카이사르가 등장한다.
원수가 되다
젊은 시절부터 귀족 공화파로부터 배척당하여 민주파에 합류하고 점차 반대파의 우두머리가 된다.
히스파니아(Hispania : 지금의 스페인 지역) 총독으로 부임한 카이사르는 그곳에서 군대를 조직해 현지의 독립마을을 정복하는데, 전쟁에서의 승리는 그의 군대에 큰 부를 안겨다 준다.
그 후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멸시를 받고 군대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 폼페이우스, 로마 최고의 부자 크라수스와 ‘삼두동맹’을 맺게 된다.
군사적 기반을 확립한 카이사르는 삼두동맹을 깨고 로마를 다시 통일한다. 이때의 로마는 과거의 우유부단한 로마공화국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중앙집권적 군사독재 국가이다.
카이사르의 죽음과 그의 역사적 지위
귀족 공화 체제를 붕괴시키고 군사, 정치적 대권을 장악하여 군주독재 체제로의 이행을 완수했다.
카이사르는 한 시대를 주름잡는 영웅이자 위대한 정치가 일 뿐 아니라 율리우스력 제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천부적인 재능과 관대함, 넓은 도량을 갖춘 군주의 전형이자 진정으로 위대한 정치가였다.
악티움 해전, 이집트를 멸망시키고 로마가 제국이 되다.
옥타비아누스는 신격화 되어 아우구스투스라 불린다.
“나는 벽돌로 된 로마를 물려받아 대리석으로 된 로마를 물려주노라”
카이사르가 살해된 후 그의 부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완권다툼이 일어난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는 제 2차 삼두동맹을 결성하나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 휘둘릴 때 삼두에서 제외시키고 이집트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에 악티움 해전(BC32년)이 발발하고, 안토니우스는 아테네로 진격하여 옥타비아누스를 공격하나 해전에서 참패하고 클레오파트라가 사망했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자결하고 클레오파트라도 또한 뒤따라 자결한다.
이로써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로 진격하여 이집트를 합병하고 이집트 왕조는 멸망한다. 이로써 로마 대제국이 건설된 것이다.
예수의 탄생, 기독교를 창시하고 전파하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 유럽에서 기독교에 확실한 지위를 부여하고, 왕권과 기독교의 관계를 강화하여 중세 유럽의 기초를 닦았다.
흉노족, 유럽에 진출하다.
한나라 시대 초기에 흉노족에 대항할 힘이 없었던 한나라 황제 유방은 화친정책을 편친다.
하지만 한나라 무제는 기원전 2세기경 흉노족과의 결전을 벌인다.
흉노족은 숲속에 살던 게르만족을 역사 무대로 끌어올리고 게르만족 때문에 로마인들의 시대가 종말하게 된다.
또한, 제국의 역사가 사라지고 다원화된 봉건주의 정치가 시작된다. 2세기 무렵 그러한 흉노족의 이주는 시작된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로마 제국이 쇠망하다.
3세기경 노예제도에 심각한 위기가 오게 되고 350년 경 유럽으로 진출하게 된다.
중세 : 유럽과 아시아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로마 법률을 집대성하다.
마그나 카르타, 군주 전제정치가 몰락하다. / 1215년
1215년에 일어난 마그나카르타는 민주공화제 영국헌정의 기원이 된다.
‘무지왕’이라 불렸던 존 왕은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각 계급을 탄압하였고, 대외정책에 실패하였으며, 교황과의 충돌을 빗었다. 또한, 이러한 처지에서 프랑스를 공격하게 된다.
전쟁에서 패한 영국의 영주들은 존 왕에게 역대 국왕들이 제정한 법률을 준수하고 신하와 백성들의 자유를 존중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존 왕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력도 서슴지 않겠다고 위협한다.
하지만 존 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무력제압당하여 결국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하게 된다.
마그나카르타
주로 국왕의 권력을 제한하고 교회와 세습귀족의 경제적, 정치적, 사법적 특권을 보호하는 내용
영국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나 봉건 전제왕권이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자 신흥 부르주아 계급과 귀족들은 마그나카르타를 왕권제한의 법률적 근간으로 삼아 새롭게 재해석한다.
영국 부르주아 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또다시 군주 입헌정치를 확립하는 헌법적인 특징의 법률로 변화한다.
마그나카르타는 궁극적으로 의회제도를 확립하고, 천부인권 사상을 내세우는 계기가 된다.
페스트의 창궐, 전 유럽을 삼키다.
14C 100년 동안 당시 유럽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2천 5백만명이 흑사병으로 사망하였다.
18세기 전후하여 유럽 각국에서는 기초 위생시설 건설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이것이 ‘제 1차 위생혁명’의 계기가 된다.
르네상스 : 서유럽에서 일어난 문화운동 / 14C ~ 17C
르네상스란?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를 이상으로 보는 반면, 중세를 인간의 창조성이 무시된 ‘암흑시대’로 봄으로써, 인간들의 지적, 창조적 힘을 부흥시키려는 신념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사상해방 운동의 기초가 되다.
14C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
“사람이 만물의 근본” → 사람이 모든 사문을 평가하는 잣대
르네상스의 유산
투쟁성, 실용주의 정신, 과학적 사고 등의 유산을 남김
실용주의 정신의 측면에서는 인간 중심적 사고를 보여주는 보카치오 「데카메론」이 있다.
데카메론 에서는 남녀평등 주장, 인간의 지혜와 재능, 사상과 감정을 신의 금욕주의적 통제와 봉건의 억압에서 해방시킬 것을 강조, 현실생활을 열정적으로 주창.
르네상스를 통해 유럽이 중세 봉건사회에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의 전환을 일으켰다.
사상의 대 해방, 인간 가치관의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 졌으며 생활 태도 또한 변화되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유럽 세계를 넓히다
제1차 항해(1492 ~ 1493) : 신천지, 새로운 인종 발견
제2차 항해(1493 ~ 1496)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 새로운 부를 추구하고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유럽 부르주아들의 욕망에 부응
유럽 자본주의 발전과 봉건제도 붕괴를 가속화
신대륙의 풍만한 물자를 가지고 유럽으로 돌아가나 담배/매독도 함께 옮겨감
마젤란 – 세계최초 세계일주
바스코 다 가마(1460 ~ 1524, 포르투갈)
동서양의 상업무역을 변화시키다.
희망봉을 돌아 최초로 인도 항해 성공
약탈의 시작 - 신항로 개척으로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서유럽의 해외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
신항로 개척 - 상업혁명 촉진
가격혁명으로 서유럽의 봉건제도의 쇠락과 자본주의의 반전이 촉진됨
동양 국가들에 대한 유럽 국가의 약탈과 식민지화의 시작
루터의 종교개혁, 부르주아 혁명의 토대가 되다
종교개혁 운동이란?
종교에 의해 단단히 묶이고 비틀려 있던 마음이 속박에서 벗어나 진리로 회귀한 역사
막스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근대 자본주의가 제일 처음 발전하게 도니 계기는 종교개혁을 통해 형성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 덕분”
비로소 근대화의 길로 접어듦
마틴 루터(1483 ~ 1546, 독일)
16C독일에서 종교개혁운동을 처음 일으킨 인물이자, 개신교 루터파의 창시자
신학공부중 하느님의 공명정대함과 징벌이 전현 별개의 것임을 깨닫게 됨
교황(레오10세)가 면죄부 발행을 빌미로 백성들을 수탈하자
「19개조 논제」 “교황이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은 기독교 원리에 위배”
교황과 종교회의의 권력은 신이 부여한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당당하게 주장
→봉건적 신권정치 전체를 공격 교회의 법규 자체를 부정
자본주의 발전에 적합한 부르주아의 청렴한 교리 주장
사람들의 내면세계 일깨움
하지만 독일 농민들이 종교개혁을 당시의 제도를 뒤업는 정치 혁명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자, 루터는 움츠러들고 결국 세속의 통치자를 대변하기에 이름.
독일에 천주교와 개신교간의 전쟁인 30년 전쟁(1618 ~ 1648)을 촉발한다.
→정치적 모순과 종교적 대립이 서로 충돌하는 유럽 전체의 분쟁으로 확대
개신교는 북유럽, 영국, 미국 등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로 부상한다.
스페인 무적함대의 종말, 영국이 강국으로 부상하다.
16C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뒤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부강한 해상제국을 건설한다. → 무적함대
영국은 자본주의가 겨우 싹트고, 경공업이 발전하는 단계였다.
무적함대가 몰락하고 스페인은 쇠락의 길을 걷게된다.
영국은 해상패권을 장악하고 섬나라에서 일약 초강대국으로 부상한다.
메이플라워호의 신대륙 상륙, 미국이 탄생하다.
16C 말 ~ 17C / 영국의 청교도들은 거센 종교개혁으로 새로운 교회를 성립하길 원하게 된다.
17C 중압 / 의회가 국교회를 주장한다.
1620년 09월 / 청교도의 유명한 지도자 브래드 퍼트가 102명을 이끌고 메이플라워호를 탑승한다.
폴리머스 항에 상륙한 그들은 메이플라워 서약을 하고 그해 혹독한 겨울 이민자 102명중 50명만이 살아남게 되는데 그들은 인디언의 도움으로 첫 수확을 거두고 그 날을 ThanksGivingDay라 하여 기념한다.
메이플라워 서약
미국 민주정치의 수많은 이념이자 이상
정부는 반드시 통치자들의 동의를 얻어야만 통치할 수 있다는 원칙의 기반
신민지 초창기 의회권력 강화
영국 국왕을 대표하는 총독과 투쟁하며 식민지의 역사 이끔
입법권, 행정권 분리의 계기가 되고
미국 정치 체제의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근대 :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베스트팔렌 조약
15C 말 / 유럽의 강대국 들로부터 절대주의 시대가 시작
절대군주제가 계급군주제 대체되어 다원화된 초기 국가가 중앙집권적 근대 민족국가로 변화
16세기에 런던, 파리, 바르샤바, 마드리드, 빈, 암스테르담, 스톡홀름이 유럽권력의 중심
1618년 부터 1648년 동안의 30년 전쟁으로 베스트팔렌 조약이 성립된다.
공통의 이익과 통인된 규정, 단일한 가치관을 가지는 국가 관계 체제 확립
공통의 이익과 통일된 규정, 단일한 가치관을 가지는 국가 관계 체제 확립
30년 전쟁
유럽에서 처음 벌어진 대규모 국제 전쟁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유럽 영토가 다시 분할
서양의 국가관계를 탄생시킨 산파
국가 주권을 보유하고 있음을 서로 인정하는 국가와 국가법 원칙에 따른 상화 관계, 그리고 세력균형의 정책에 따라 자국의 생존 환경을 지키는 국제 사회가 기독교를 매체로 결합된 것이 서양의 국가 관계체제라고 분석
영국의 권리장전, 최초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다
17C 영국혁명 → 유럽정치혁명의 시작
스튜어트 왕조 1대 국왕 제임스 1세, 2대 아들 찰스 1세에 걸쳐 잉글랜드 성공회의 교리와 인식을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고, 국교를 믿지 않는 백석, 청교도 탄압하였다.
왕당파 VS 의회파(크롬웰)에서 의회파가 승리하고 크롬웰은 재판을 통해해 찰스 1세를 처형한다.
그리고 제임스 2세, 찰스 2세가 재위한다.
그러나 제임스 2세의 재위 반대운동이 일어나고 의회파가 사위인 윌리엄을 국왕으로 둘째딸 메리를 여왕으로 앉히는 명예혁명이 일어난다.
권리장전 : 국왕은 반드시 국교회를 신봉하고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며 국회의 권위를 보장하고 법률에 대한 국왕의 거부권을 폐지했다.
국회의 권리에 대해 자유주의 원칙을 적용하고 국회의원은 언론의 자유와 자주회의를 보장받게 된다. 또한 권리장전은 부르주아의 통치지위를 인정하고 정식으로 입헌군주제의 새로운 국가를 수립한다.
표트르 1세, 러시아의 현대화를 촉진하다
당시 러시아는 매우 낙후된 내륙국가로 서양인들의 눈에는 야만족의 국가일 뿐이었다.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서양을 본받는 것이었고, 표트르대제는 이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다로 보아, 터키의 아조프를 공략한다.
표트르대제의 개혁
문화교육을 장려하고, 전문학교를 설립
생활양식을 개혁하여 귀족들에게 서양풍습 권장
행정기관도 전면 개혁하여 지방정권을 완벽하게 중앙, 즉 자신의 손안에 집중
강력한 군대와 해군을 창설하고, 능력에 따른 관리등용
마르크스
“표트르대제는 야만적인 방법으로 러시아의 야만성을 정복했다”
표트르 요새
북유럽 최강국이자 유럽의 강대국 중 하나인 스웨덴을 공격목표로 하여 ‘발트해’의 통제권을 빼앗으려 했다.
첫 침략에 패배하자 표트르는 백성들을 수탈하고 무자비한 징용으로 러시아 최초의 해군 함대인 ‘발트함대’를 창설했다.
표트르 1세는 전제정치를 강화하고, 경제력, 군사력 증강을 통한 대외확장으로 러시아를 유럽의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계몽운동, 부르주아 혁명의 원동력이 되다.
18C
계몽(Enlightenment)이란?
사람을 지혜롭게 하고, 교육과 홍보를 통해 사람들을 무지하고 낙후된 암흑의 봉건 사회엣 해방.
18C 유럽에서 일어난 봉건주의와 교회에 반대하는 사상, 문화 혁명운동
영주의 주권/신권/특권이 장기간 독보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은 바로 사람들이 무지하고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믿었기 때문.
인간의 가치/권리를 강조하는 사조 출현
르네상스 이후 유럽에서 두 번째로 일어난 정신 해방운동.
민주정치와 평등한 권리, 개인의 자유 추구
프랑스 대혁명을 위한 여론을 형성하고
형명의 충분한 정신적 토향을 제공했다.
계몽운동의 중심지는 프랑스였다.
사상가의 배출
볼테르
봉건교회와 봉건통치를 신랄하게 비판
but, 그의 비판은 무신론적 관점에서 나온 것이 아닌 종교의 부패와 타락, 음탕함에서나온 것
“하느님이 없다면 일부러 만들어 내기라도 해야한다.”
종교가 사람들의 마음을 이어주리라 믿음
몽테스키외
계급혁명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의 삼권분립 원칙 완성 → ‘견제와 균형의 원칙’
루소
프랑스 사회 신랄하게 비판
사회계약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한 존재이고 사회에는 사람의 공통된 이익인 ‘공적이익’ 이 있어서 그 공적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모두 계약을 준수해야 한다.”
통치자가 사회계약을 파괴하려고 할 때 사람들은 그를 몰락시킬 권리가 있다.
국민 주권론
디드로
프랑스 계몽사상가 중 가장 영향력이 크다
「백과전서」 계목사상의 특징인 반미신, 반종교, 반전제, 반사회 불공평을 반영
대혁명의 정신
볼테르와 몽테스키외는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찬성하였다.
루소
“영국인들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국회의원을 선출할 때만 자유로우면, 국회의우너이 선출된 후에는 곧 노예로 변할 것이다.”
국민이 직접 국가 주권과 입법권을 가지는 ‘민주공화제’ 주장
루소의 사상은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이 된다.
계몽운동
프랑스 대혁명의 이론, 사상적 기반이 된다.
국경, 시대를 초월하여 광범위한 공간과 오랜 시간속에서 커다란 작용을 한다.
18C 미국의 독립전쟁과, 정치제도 수릭, 헌법 제정에 영향을 주고, 중국, 일본에도 큰 영향을 준다.
산업혁명,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서막이 울리다.
18C 산업혁명은 작업기계에서 시작되었고, 점차 다른 분야에서도 기계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방직 산업의 혁명과 함께 산업 전체에 혁명이 시작 되었다. 기계를 사용하고 과학원리를 널리 응용하는 거싱 진보의 원동력임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사회 계층인 프롤레타리아가 역사의 무대위로 등장하였고, 19C 영국과 프랑스 등지에서 수탈, 압박에 저항하는 차티스트 운동이이 일어났다.
리옹에서는 노동운동인 파리코뮌이 일어났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자유주의 경제학을 확립하다.
도덕감정론
이기주의적 본성을 가진 개인이 어떻게 감정이나 행위, 특이 이기적인 감정이나 행위를 억제하고, 또 행위 준칙이 필요한 사회를 확립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국부론
‘국가의 부의 성질과 원인에 대한 고찰’
핵심은 국민의 부의 성질과 원인을 명확하게 규명하여,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국민의 부는 국가가 생산한 상품의 전체 수량이며, 정치경제학의 목적은 국민의 부의 성장을 촉진하고, 개인과 사회, 생산자의 이익 중 어느 하나도 희생시키지 않고 골고루 보호하는 것이다.
인성론에서 출발하여 인간을 분석하고, ‘경제인’으로서의 사람들이 이기주의에서 출발하여 이타적인 결과에 도닥한다는 자유 발전 정책을 지지한다.
시장 경제의 이론적 기초와 상품경제 운행의 원칙을 설명하였다.
미국 독립 전쟁, 아메리카 합중국이 탄생하다.
18C
17세기 초 유럽인들이 북아메리카 지역으로 옮겨가기 시작하고, 1607년 영국의 첫 이민자들이 버지니아에 첫 근거지인 ‘제임스 타운’을 설립하면서 북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이민 열풍이 시작되었다.
1733년 마지막 식민지인 조지아가 건립될 때까지 13개 식민지가 미국 최초의 13개 주이다.
이미 영국과는 다른 새로운 민족, 즉 미합중국 민족이 형성되었다.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진의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이론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려는 움직임이었다.
보스턴 학살사건
1770년, 북아메리카에 주둔한 영국군이 보스턴 시민을 사살하였다.
이로인해 민중의 분노가 극에 달했고, 각 식민지마다 민병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1774년 12개 식민진에서 선출된 55인이 필라델피아에서 제 1차 대륙회의를 가졌다.
영국 국왕 5만 군대 동원하여 대륙회의에서 정규 대륙국은 창설하였고, 조지 워싱턴이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다.
1776년 7월 4일 제 2차 대륙회의에서 독립선언이 통과되었다.(독립 기념일)
토마스 제퍼슨이 독립선언 주요 기초위원이다.
미국 독립전쟁은 반영전쟁으로 확대되고 영국은 고립된다.
미국 독립 전쟁
세계역사상 첫 식민지의 민족 해방 전쟁이다.
미국의 자본주의와 현대 문명이 신속하게 발전할 수 있는 탄탄대로를 닦았다.
독립 선언
천분인권과 사회계약론을 계승 발전하여 식민지 독립 투쟁의 이론적 근거가 된다.
인간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며, 하느님으로 부터 부여받은 생존과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이 같은 권리를 추구하기 위해 정부를 수립하며, 그 어떤 정부라도 이를 침해하면 국민들이 정부를 교체하거나 해산시키고 새로운 정부 수립이 가능하다.
프랑스 대혁명, 서구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탄생하다.
18세기 프랑스는 자본주의 상공업이 이미 크게 발달해 있었으나, 그와 동시에 유럽 대륙에서 가장 전형적인 봉건 전제국가였다.
부르주아 계급은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였고, 사회 전반적으로 계급간 갈등 대립이 심각해졌다.
프랑스 봉건 정부의 재정 악화로 삼부회(성직자, 귀족, 평민 대표 신분제 회의)를 소집하였다.
제 3계급 대표는 국왕 권력 제한하고 삼부회를 국가 최고 입법기관으로 정하기로 하였으나
루이 16세가 국민의회의 개최를 막자 ‘제헌국민의로’로 개명하고 공개적으로 반항하였다.
1789년 7월 14일 (혁명 기념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이 일어났다.
제헌국민의회가 프랑스 최고 행정기관이자 입법기관이 되고 ‘인권선언’을 표한다.
이 인권선언에는 천부인권, 자유, 평등의 원칙이 제시되어 있다.
1791년 제헌국민의회에서 헌법이 발표되고 입헌군주제를 선포하였다.
지롱드파의 정권 장악에서 테르미도르 반동까지
지롱드파
상공업자들의 이익을 대변한다.
입법의회를 장악하고 행정권을 손에 넣었다.
프랑스 발미전투 이후 국민공회가 입법의회를 대신하여 계승한 국민 공회가 공화정 선포하는 결의를 통과시켰고, 이는 프랑스 제 1 공화정이 된다.
자코뱅파
중산적 부르주아와 소생산자층의 이익 대변하는 계파이다.
공포정치를 시행하였고, 공화정과 혁명을 구원하는 데는 큰 효과를 발휘하였지만, 급진성과 공포정치 때문에 분열과 내분이 일어 났다.
로베스 피에르는 프랑스 대혁명의 성과를 완전하게 지켜내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유럽 각국의 봉건군주가 반프랑스 동맹을 구축하고 봉건통치를 부활시키려 했다.
온건파가 테르미도르 반동을 일으켜 새로운 혁명정부인 총재정부를 구성하나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봉건세력을 완전히 궤멸시키고 최종적으로 혁명의 성과를 굳건히 수호한다.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유럽 대륙에서 빠르게 성장하였다.
민족주의
중세시대에는 백성은 나라에 충성해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첫째로 기독교인이며, 둘째로 부르고뉴나 콘원 주민이고, 끝으로 프랑스인이나 영국인이라 생각하였다.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시기 민족주의가 고취되었고, 이는 유럽 역상의 중요한 일부이자 20C 세계 역사의 중요한 일부이다.
자유주의
프랑스 대혁명으로 19세기 말 유럽 대부분 국가에서 성년 남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였다.
새롭고 민주적인 자유주의가 발전하여 국가가 국민 전체의 복지를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복지국가 탄생의 밑거름이 된다.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과 원칙은 유럽에서 널리 전파되어 19세기 유럽 각국에서 등장한 부르주아 계급 혁명가를 길러낸다.
워털루 전쟁, 나폴레옹이 몰락하다
19세기
유럽의 반프랑스 연합군이 파리를 함락하고 나폴레옹은 퇴위하여 엘바 섬으로 유배된다.
몰래 탈출한 나폴레옹은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르나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등 연합군과 전투를 벌여 결국 워털루 전쟁에서 패배한다.
프랑스 제 1제국이 완전히 몰락하고 유럽은 프랑스 대혁명 이전모습을 회복하였다.
부르주아 혁명의 좌절과 전제정치의 부활이 되었고, 영국은 세계적인 대제국이 된다.
아편전쟁, 서구 열강이 중국을 삼키다.